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IMF를 겪은 이유를 소개하고 있는 부분인데....
우리나라가 IMF를 겪은 이유가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이었다니.......
IMF를 겪기 전일까지도 국민들에게는 국가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무능력한 위정자들때문에 일어난 IMF가 아니었던가... 일본의 역사왜곡을 탓하기 이전에 저런 부분부터 정확하게 짚고 나가야 되지 않을까?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다시는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테니......
1997년 1월 23일
재계 자산순위 14위 규모의 한보철강이 자금난으로 부도처리
(대한민국 외환위기 사태의 첫 신호탄이 됨)
1997년 3월 18일
재계 26위 삼미그룹 부도
삼미그룹의 부도로 100여개의 삼미특수강 하청업체 연쇄 도산 우려
1997년 4월 21일
자금난을 겪는 진로그룹의 부도를 막기위한 정부의 부실기업 정상화대책 발표.
부실기업정상화 대칙이 급박하게 추진되면서 제2금융권등 자금시장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됨.
이로인해 다른 기업의 부도가 되려 앞당겨지게 되고, 5월 대농그룹, 6월 한신공영등 굴지의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처리되며 무너짐
1997년 7월 15일
재계 서열 8위 기아그룹이 부도방지 협약 대상으로 지정되며 사실상 부도처리
기아의 5천개가 넘는 협력업체에도 영향을 끼치며 한국경제에 큰 파장을 일으킴
1997년 10월 15일
쌍방울 그룹이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법원에 화의신청을 내고, 다음날 최종 부도처리됨
태일정밀 그룹 역시 10월 16일 쌍방울과 함께 부도를 맞이함.
이당시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경제에 대한 평가를 끝낸 국제통화기금 IMF 조사단은 한국은 장기적인 구조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위기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며 한국은 경제위기라고 하기 어렵다는 발표를 한다.
하지만 10월 24일 미국 S&P사는 한국 국가 신용등급을 장기 : AA- -> A+로 단기 : A1+ -> A1으로 하향조정한다.
1997년 10월 27일
연이어 주식이 폭락하고 환율이 솟구치는 상황속에서 1달러에 940원을 넘어서는 모습까지 연출되며 주가 500선 붕기가 우려되는 사태가 발생함.
미국 무디스사가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 A1 -> A2, 단기 : P1 -> P2로 하향 조정함.
1997년 10월 28일
종합주가지수 500선이 무너지며 증시붕괴 위기감이 고조
증시 하락지수는 35.19포인트로 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하락폭 6.63%도 사상 최대치였음.
미국 투자기관 모건스탠리는 "아시아를 떠나라"라는 보고서를 띄웠으며 강경식은 정부에 외환시장개입중단을 지시했지만 재판에서는 불인정됨.
1997년 10월 30일
환율이 1달러 천원 가까이 치솟았다가 정부의 개입으로 폭등세가 주춤해졌으나 주가는 다시 폭락해서 외환시장과 증시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짐.
1997년 10월 31일
환율급등으로 11월 1일부터 유가가 인상된다는 소식에 주유소에는 미리 기름을 넣기 위한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진풍경이 연출됨.
1997년 11월 1일
해태그룹 부도처리. 당시 재계 순위 24위였던 해태그룹은 30대 그룹 가운데 5번째로 부실기업의 나락으로 떨어짐
1997년 11월 4일
재계순위 25위인 뉴코아 그룹이 화의신청을 한 이후 최종 부도
1997년 11월 7일
주가가 사상 최대폭으로 떨어졌고, 환율은 다시 급등함.
1997년 11월 10일
환율이 사상 처음으로 1달러에 천원을 넘어서게됨.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부총리 홍재형의 다급환 전화를 받고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고 함.
1997년 11월 17일
외국 언론은 한국 IMF 구제금융 요청 가능성을 시시하였고,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600억 달러 긴급지원을 검토하였다고 보도하였지만, 이때까지도 재정경제원은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하는 태도를 보임.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 IMF의 구제금융을 신청하며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함.
위환위기가 한창이었던 11월초 외환보유고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던 강경식 부총리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있은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었다.
1997년 12월 3일
IMF로부터 550억달러를 지원받게 되었지만, 한국경제는 사실상 IMF의 법정관리에 들어가게됨.
1997년 12월 5일
금융기관으로서는 최초로 고려증권이 부도처리됨.
IMF체제에 따라 위기를 느낀 거래 은행들이 자금 제공을 기피하여 어음 2,700억원을 막지못하게 된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됨.
1997년 12월 6일
재계 12위인 한라그룹의 부도. 한라그룹의 부도로 현대를 비롯한 거래 업체들이 적지않게 피해를 입고, 1997년 한해동안 하루평균 40여개의 기업이 부도가 났음.
정부는 IMF와의 협상과정에서 하나를 양보하면 IMF는 또다른 조건을 내세워서 항복을 요구했고, 결국 IMF 기관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말았다는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IMF에 도움을 받는것은 불가피했지만 IMF의 요구에 너무 많은것을 내준게 아니냐는 우려에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은 국민들이 뭘 몰라서 내정간섭으로 오해한다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었다.
1997년 12월 10일
1달러에 1600원까지 환율이 치솟으며 연초 800원대 대비 2배로 오른다.
정부는 부도 위기에 몰린 5개 종합금융사 (나라, 대한, 신한, 중앙, 한화)에 종금사 업무정지명령을 내린다.
이상태가 지속될경우 기업과 다른 은행들까지 쓰러질지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
무디스는 한국 국가 신용등급을 장기 : A3 -> Baaa2(준 Junk). 단기 : P-3 -> N.P(투자부적격)으로 하향 조정한다.
1997년 12월 11일
환율이 1달러에 1719원까지 치솟았고, 나흘 연속 제한폭까지 오르며 외환시장은 마비되어버린다.
1997년 12월 18일
제 15대 대통령으로 김대중 후보 당선
1997년 12월 23일
사상 처음 1달러가 2천원선으로 폭등한다. 갚아야할 외채만 2000억 달러에 육박한다.
2000년 12월 10일.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증진시킨 공로로 새천년 첫번째 노벨평화상으로 지목된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자리에서 국제통화기금은 모든 차관을 상환하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한다.
2001년 8월 23일
IMF로 부터 빌린 195억달러를 모두 갚으며 3년 8개원만에 외환위기사태, 즉 IMF 사태가 공식 종료된다.
재계 자산순위 14위 규모의 한보철강이 자금난으로 부도처리
(대한민국 외환위기 사태의 첫 신호탄이 됨)
1997년 3월 18일
재계 26위 삼미그룹 부도
삼미그룹의 부도로 100여개의 삼미특수강 하청업체 연쇄 도산 우려
1997년 4월 21일
자금난을 겪는 진로그룹의 부도를 막기위한 정부의 부실기업 정상화대책 발표.
부실기업정상화 대칙이 급박하게 추진되면서 제2금융권등 자금시장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됨.
이로인해 다른 기업의 부도가 되려 앞당겨지게 되고, 5월 대농그룹, 6월 한신공영등 굴지의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처리되며 무너짐
1997년 7월 15일
재계 서열 8위 기아그룹이 부도방지 협약 대상으로 지정되며 사실상 부도처리
기아의 5천개가 넘는 협력업체에도 영향을 끼치며 한국경제에 큰 파장을 일으킴
1997년 10월 15일
쌍방울 그룹이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법원에 화의신청을 내고, 다음날 최종 부도처리됨
태일정밀 그룹 역시 10월 16일 쌍방울과 함께 부도를 맞이함.
이당시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경제에 대한 평가를 끝낸 국제통화기금 IMF 조사단은 한국은 장기적인 구조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위기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며 한국은 경제위기라고 하기 어렵다는 발표를 한다.
하지만 10월 24일 미국 S&P사는 한국 국가 신용등급을 장기 : AA- -> A+로 단기 : A1+ -> A1으로 하향조정한다.
1997년 10월 27일
연이어 주식이 폭락하고 환율이 솟구치는 상황속에서 1달러에 940원을 넘어서는 모습까지 연출되며 주가 500선 붕기가 우려되는 사태가 발생함.
미국 무디스사가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 A1 -> A2, 단기 : P1 -> P2로 하향 조정함.
1997년 10월 28일
종합주가지수 500선이 무너지며 증시붕괴 위기감이 고조
증시 하락지수는 35.19포인트로 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하락폭 6.63%도 사상 최대치였음.
미국 투자기관 모건스탠리는 "아시아를 떠나라"라는 보고서를 띄웠으며 강경식은 정부에 외환시장개입중단을 지시했지만 재판에서는 불인정됨.
1997년 10월 30일
환율이 1달러 천원 가까이 치솟았다가 정부의 개입으로 폭등세가 주춤해졌으나 주가는 다시 폭락해서 외환시장과 증시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짐.
1997년 10월 31일
환율급등으로 11월 1일부터 유가가 인상된다는 소식에 주유소에는 미리 기름을 넣기 위한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진풍경이 연출됨.
1997년 11월 1일
해태그룹 부도처리. 당시 재계 순위 24위였던 해태그룹은 30대 그룹 가운데 5번째로 부실기업의 나락으로 떨어짐
1997년 11월 4일
재계순위 25위인 뉴코아 그룹이 화의신청을 한 이후 최종 부도
1997년 11월 7일
주가가 사상 최대폭으로 떨어졌고, 환율은 다시 급등함.
1997년 11월 10일
환율이 사상 처음으로 1달러에 천원을 넘어서게됨.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부총리 홍재형의 다급환 전화를 받고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고 함.
1997년 11월 17일
외국 언론은 한국 IMF 구제금융 요청 가능성을 시시하였고,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600억 달러 긴급지원을 검토하였다고 보도하였지만, 이때까지도 재정경제원은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하는 태도를 보임.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 IMF의 구제금융을 신청하며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함.
위환위기가 한창이었던 11월초 외환보유고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던 강경식 부총리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있은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었다.
1997년 12월 3일
IMF로부터 550억달러를 지원받게 되었지만, 한국경제는 사실상 IMF의 법정관리에 들어가게됨.
1997년 12월 5일
금융기관으로서는 최초로 고려증권이 부도처리됨.
IMF체제에 따라 위기를 느낀 거래 은행들이 자금 제공을 기피하여 어음 2,700억원을 막지못하게 된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됨.
1997년 12월 6일
재계 12위인 한라그룹의 부도. 한라그룹의 부도로 현대를 비롯한 거래 업체들이 적지않게 피해를 입고, 1997년 한해동안 하루평균 40여개의 기업이 부도가 났음.
정부는 IMF와의 협상과정에서 하나를 양보하면 IMF는 또다른 조건을 내세워서 항복을 요구했고, 결국 IMF 기관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말았다는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IMF에 도움을 받는것은 불가피했지만 IMF의 요구에 너무 많은것을 내준게 아니냐는 우려에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은 국민들이 뭘 몰라서 내정간섭으로 오해한다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었다.
1997년 12월 10일
1달러에 1600원까지 환율이 치솟으며 연초 800원대 대비 2배로 오른다.
정부는 부도 위기에 몰린 5개 종합금융사 (나라, 대한, 신한, 중앙, 한화)에 종금사 업무정지명령을 내린다.
이상태가 지속될경우 기업과 다른 은행들까지 쓰러질지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
무디스는 한국 국가 신용등급을 장기 : A3 -> Baaa2(준 Junk). 단기 : P-3 -> N.P(투자부적격)으로 하향 조정한다.
1997년 12월 11일
환율이 1달러에 1719원까지 치솟았고, 나흘 연속 제한폭까지 오르며 외환시장은 마비되어버린다.
1997년 12월 18일
제 15대 대통령으로 김대중 후보 당선
1997년 12월 23일
사상 처음 1달러가 2천원선으로 폭등한다. 갚아야할 외채만 2000억 달러에 육박한다.
2000년 12월 10일.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증진시킨 공로로 새천년 첫번째 노벨평화상으로 지목된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자리에서 국제통화기금은 모든 차관을 상환하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한다.
2001년 8월 23일
IMF로 부터 빌린 195억달러를 모두 갚으며 3년 8개원만에 외환위기사태, 즉 IMF 사태가 공식 종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