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에는 여러 도전이 있다. 돈은 기회를 만들고 인생의 난이도를 낮춘다. 돈이 없는 아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에 도전하지만 녹록치 않다. 누군가는 쉽게 오를 수 있는 계단이지만, 스스로의 노력밖에 믿을 구석이 없는 아이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겨우 몇 단계를 넘는 것이 고작이다.
더 잔인한 사실은 도전의 실패가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실패가 치명적일 수도 있다. 뒷받침이 되는 재력이 있는 아이는 수능을 망쳐도, 사업에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주어진다.
실패는 성공을 위한 과정일 뿐이지만, 재기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대개 가난한 자의 몫이다. 시간과 기회마저 돈으로 살 수 있는 자본주의 세상이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라는 웃지 못할 말들이 떠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값비싼 비용이 든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지 못하고 좌절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도 가장 가엽고 슬픈 대상은 노숙인이라고 생각한다.
“노숙인은 ‘집이 없고 직장을 잃고 건강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없는 사람’이다.”(<가난할 권리>, 13페이지)
사람도 없고, 그래서 다시 일어날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 그들의 가난은 “불성실과 무능의 결과가 아님(21페이지)”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패배자로 낙인찍힌 불행한 사람들. 춥고 외로운 길바닥으로 스스로를 내몬, 죽음보다 더 잔인한 삶을 사는 그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 이르기까지 발버둥 한 번 안 쳐봤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벗을 수 없는 가난의 굴레에 굳게 갇혀 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발벗고 나선 선한 사람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 작가다.
“복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지막 권리를 지키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가난할 권리’이다."(13페이지)라는 신념을 가슴에 품고, 인문학과 책이라는 ‘디딤돌’을 수십 년간 쌓아주고 있다.
노숙인에게 그가 전하는 복음의 인문학은 노숙인에게 “술에 취해 거리에 쓰러져 있던 나를 일으켜 세워 주고, 밥도 주고 지식도 주고, 무엇보다 생각이라는 걸 하게 해준(96페이지)” 고마운 존재다. 스스로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나아가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합류하여 우뚝 설 수 있는 기회를 최준영 작가와 여러 봉사자들이 만들어주고 있었다. 위대한 과업임에도 “사람을 알기 위한 공부(196페이지)”일 뿐이라며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
나는 위 그림에 덧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책을 쌓아서 계단을 만들어주는 선한 인문학자들, 기꺼이 손과 어깨를 내주어 위로 끌어올려주는 선한 봉사자들, 그리고 여러 번 실패해도 괜찮다고, 더 많은 도전을 하라고 응원하는 공동체 사람들을 그리고 싶어졌다. 가장 낮은 곳에서 해가 떠오르듯, 희망의 온기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피어나길 바란다.
“체험은 개별적이고 특이해 설명이 불가능한 반면, 경험은 오직 관계를 맺을 때 일어난다. 경험은 이야기로 만들어 누군가를 깨닫게 할 수 있다.(141페이지)”
출처 : 최준영 교수님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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